“넌 이제부터 내 아들이야…” 어린 시절 호주 빈민가에서 자란 꼬마를 한국인 여성은 친아들 처럼 길렀고 아들이 크고난 뒤 엄마에게 한 깜짝 놀랄 행동에 모든 사람들이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분이고 가장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저는 호주 빈민가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어린 시절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계실때도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아, 주변 병원 아니면 양로원 같은 곳을 스스로 찾아다니며 끼니를 떼우곤 하였습니다.

당연히 주변 친구들은 불량배들이었습니다. 제 나이 고작 9살이었지만, 술, 담배, 강도, 절도, 소매치기등 어린나이에 누구도 할수 없는, 하면 안되는 것들을 못된 형들과 어울리며 시키는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주 정부에서는 입양희망자가 나올때까지 위탁가정을 찾아 주었습니다.

한국계 가정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나를 보고 싱글벙글하셨지만 아주머니는 시큰둥한 모습에 전혀 반갑지 않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첫날 아주머니는 집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알려주셨습니다.

“첫째 절대 뛰지말고 뒷 꿈치를 들고 살살 걸어야 한다. 여긴 아파트니까. 둘째 반찬 투정은 절대 안된다. 처음부터 밥은 부족하지 않게 줄거야. 하지만 더 달라고 하면 더 줄거야. 반찬 투정은 안된다”

어린 마음에 심술이 났습니다. 막 뛰어다니고 반찬투정도 하고. 말도 안듣고..

아주머닌 화가 나서 엉덩이를 한 대 치면 아저씨는 “아직 어린아이지 않소. 험하게 하지말고 말로 하소.”

울고있는 나를 마트로 데리고 가서 과자와 젤리를 사주셨습니다.

“얘야~ 아주머니가 너 미워서 그러시는 것 아니란다. 너의 장래가 걱정되서 그러는 거니까, 너를 바르게 키울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이 아저씨는 네가 왜 말썽을 피우는 지 알고 있단다. 아직 나쁜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던 버릇이 남아있었서 그런거야.

그때는 교육 시킬 사람이 없어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착한 사람이 되라고 그러는 거니까 오해 말고 너도 잘 따라주면 고맙겠구나”

하지만 난 여전히 반항하고 아주머니는 혼 내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위탁가정에 있으면서도 나쁜 형들과 소매치기를 하다 경찰에 잡혀 들어 갈 일이 생겼습니다.

경찰은 부모님 인적을 물었습니다.

“부모님 두분다 돌아가시고, 소매치기는 누가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제가 스스로 한 것입니다”

아주머니가 놀란 얼굴을 하고 경찰서로 왔습니다.

“괜잖니? 단친 곳은 없는 거야?”

제가 경찰서에 오게 된 경위를 들은 아주머니는 저 아이는 어리고 여린 아이라서 절대 스스로 나쁜 짓을 할 아이가 아니다. 나쁜일을 했다면 누군가가 시켰을거라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쁜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잡아왔다면 신고자와 경찰 측이 인권침해를 하고 있는거라면서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였고 경찰도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려가라 하였습니다.

집으로 오는 도중 아주머니는 집에가서 어떤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해 달라고 하였고 나를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 후 나쁜 형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학교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하였고많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입양하고 싶다는 가정이 생겨 아주머니와 헤어질 날이 다가왔습니다.

경제력이 아주 좋은 가정에서 저를 입양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부족함없이 자랄 좋은 환경이라 할수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정이 들었는지 저를 입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인종은 다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에게도 어머니, 아버지가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하고 싶다는 것은 어떻게든 할 수 있겠 끔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변득이 죽끓듯 하는데도 무조건 저의 편이셨습니다.

입양한 저에게 왜 이렇게 잘 해 주냐 물으니,

“너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니,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당연하단다. 너도 우리에게, 우리도 너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행복하게 살자꾸나”

그 말씀을 듣고 꼭 성공해서 보답을 해드려야겠다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깐. 고등학교 2학년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가장이 되었고 어머니를 지켜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대학을 포기하니 어머니는 절대 안된다고 하셨지만, 난 집 앞에 패스트푸드 식당을 열었습니다.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식당은 바빠졌고 어머니는 더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식당은 계속 번창하여 프렌차이즈로 7호점까지 내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어머닌 사업재능이 있다며, 앞으로 양식업이 괜잖을 거라며 추천을 하셨고, 정부에서도 양식업 확대에 큰 지원을 하였습니다.

역시 안목이 대단하신 어머니덕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나는 사업확장을하기 위해 기술개발에도 전염할수 있었습니다.

다른 업체에서 기술제휴와 공동개발을 제안했고, 미국과 호주에서 양식장을 운영하며, 요식업 프렌차이즈 2개를 같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이 커지고 나니 어머니께 무엇을 해드리면 될까를 생각하다 어머니의 고향 한국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편하게 생활할 수 있게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에 살면서 또 다른 사업을 하려고 구상중에 있습니다.

어린시절, 내 삶에서 한국인 부모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부모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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