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같은 사람이랑 우리 딸 절대 결혼 못시켜” 대형 트럭을 운전하는 택배기사인 저를 못마땅해 하는 장모님 때문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살림을 차렸고 시간이 지난 뒤 저희 집에 찾아온 장모님의 행동에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현관문앞에 커다란 포대자루가 세 개 놓여 있고 택배기사는 사인을 해 달라며 영수증을 내 앞에 쑥 내밀었습니다.

장모님이 힘들게 농사지어 보내신 쌀과 감자, 양파, 마늘이 든 포대자루…

처의 고향은 땅끝마을 해남입니다. 처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위해 상경. 직장생활 몇년에 중매로 나를 만나 결혼을 하겠다고 처음 인사를 드리려고 해남을 가게되었습니다.

당시 나의 직업은 대형 화물차 운전사. 나는 대형차 운전하여, 달려 도착한 처가..

시골동네 처가댁 아줌마들은 이 집에 사윗감이 온다는 소식에 구경이나 하자 모여있었습니다.

‘사윗감이 운전수네’ ‘키가 좀 작으네’ ‘이 집 딸은 덩치가 한 덩치인데 남편감이 깔려죽겠구만’등등 자기들끼리 나를 들었다 놓았다 난리가 안니었습니다.

장인장모 두분께 절을 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인사 올립니다. 절 받으세요”하고 절을 하려는데, 장모님께서 갑자기 휙 돌아 않으시면서,

“난 반대야 내딸 고생하는 꼴 나는 못보네. 더구나 운전을 한다니 더 반대일세. 하루하루 불안해서 어찌 살겠나”

장모님은 적극 반대라하시고 장인어른은

“운전을 잘하는구먼 저 큰 차를 잘 몰고왔어. 힘도 좋겠구만” 힘으로만 운전하는 줄 아시는 장인어른…

두 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가 식구들은 체격도, 키도 컸으며, 손위 동서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날 처갓집에서의 서운함과 갈등이 나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처가집 반대에도 우리는 살림을 차렸습니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장모님께 믿음을 주기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운전을 접고 회사에 입사 교대근무를 하며 열심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장에서 내내 눈물을 보이시던 장모님..

저는 열심히 노력해서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고 며칠 지나 두분이 아파트에 오셧씁니다.

“이서방 고생했네. 잘 살아줘서 너무 고맙네 고마워”

또 눈물을 보이시는 장모님. 나는 아직도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해마다 농사를 지어서 바리바리 싸서 보내시는 장모님. 장인어른이 몸이 좋지않아 혼자 농사일을 하셔서 보내주시는 온갖 농산물들..

오늘도 장모님의 사랑이 담긴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하니, 도리어 장모님이 연신 고맙다고, 잘 살아줘서 고맙고, 건강하시게나로 답을 하셨습니다.

“네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장모님” 결혼 전 서운함이 눈 녹듯이 녹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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