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인 저와 세살이던 동생을 할머니 손에 남겨 두고 서울로 돈 벌러 가신 엄마.
교통사고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닌 남겨진 빚을 갚기 위해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우리 남매는 시골에 계신 할머니께 맡겨졌고, 1년이 지난 어느날, 큰아버지와 친척분들이 할머니댁으로 찿아오셨습니다. 갑자기 큰아버지와 할머니가 언성을 높이면서 막 싸우셨습니다.
한참을 싸우시던 큰아버지는, 흐느끼는 할머니를 쳐다보지도 않고, 저희 남매 손을 잡아 끌었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어 나오시던 할머니는 저희 둘을 끌어 안고 우셨습니다.
“안된다. 안돼. 이것들 보내면 내가 죽어서 내 아들 얼굴 볼 낯이 없다. 불쌍해서 못 보낸다. 너희들한테는 십원도 내 놓으라 안할테니 신경쓰지 마라. 내가 키울란다 내가 키울란다”하시며 목 놓아 우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우리 남매는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되었고 오늘의 저희들을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할머니가 키우기엔 우리 둘은 너무 어렸고, 지켜보자니 갑갑했을 친척분들이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가 되었고, 고아원에 갈뻔한 저희 둘을 억척으로 키워 주신 할머니의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가 없다는 것을 철이 들 무렵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친척분들께 돈 한푼 받지 않으셨고, 당신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하루도 거름 없이, 남의 집 품을 팔았고 당신스스로 억척스러워져야만 했던 것을 어려선 몰랐습니다. 맛난 것 배불리 먹지못하는 게 불만이었고 항상 남의 옷 얻어 입는 게 불만이었고 새로운 학용품 쓰지 못하는 것도 불만이었고 소풍갈 때 용돈 제대로 못 받는 것도 불만이었고, 운동회때는 할머니랑 함께 달리는 것도 불만이고 부모없다고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불쌍한 취급받는 것등 남들과 비교하여 부족하다면 무조건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닌 불만을 토할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소풍때 용돈 못 준 것, 운동회때 없는 부모대신이었던 것, 남의 옷 얻어입힐때, 부모없다고 손가락질 받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참았을지 그때는 철이 없어 몰랐습니다. 그저 불쌍하게 보여 남들에게 한개라도 더 얻을려고 하는 할머니가 창피하고 미웠을 뿐이었습니다. 당신 인생을 모조리 손주들에게 내어 놓은 줄도 모르면서…
할머니는 손주들을 위해 자존심도 버리시고, 더 불쌍하게 보이면 손주들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올 수 있는지도 알고 계셨고 덕분에 과자 한 봉지도, 연필 한자루라도 공짜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면 억척스럽고 강하게 보였겠지만 손주들에겐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장 날이 되면 나물을 팔아 순대를 한 봉지 사오시고, 동생과 싸우면 회초리를 드셨고, 자국이 생긴 종아리 약을 발라주시며 눈물을 훔치시며 넉넉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누룽지를 눌려 설탕을 발라 주셨고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우산이 없던 우리는 비닐을 우비처럼 덮어주시며, 아이들이 놀리면 “우산쓰면 옷이 다 젖는데 이렇게 돌돌 싸면 비 한방울도 안들어와 옷도 안젖는다 너네 들도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봐”라고 시키셨습니다.
저희 남매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저는 상고를 동생은 인문고를 가게 되면서 자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말마다 집엘 가면 냉장고에는 새참으로 받은 우유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어릴때 우린 맛있게 먹었는데, 여전히 할머닌 새참을 잡숫지 않고 냉장고에 쟁여두었다가 우리가 오면 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지 말고 드시라 했지만 손주들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지나간 날짜의 우유를 몰래 버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불쌍한 할머니를 볼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철이 들었나 봅니다.
할머니가 김치를 들고 서울 오신날, 터미널에서 쪼그리고 계시던 할머니. 생각보다 버스가 일찍도착했다며 나를 반기셨습니다. 가방에는 비닐을 쒸우지 않은 김치 두 통이 들어 있었는데 김치국물이 넘쳐 난리가 났습니다. “할머니 비닐도 안쒸우고 이게 뭐여? 이걸 어떻게 가져가?” 당황한 할머닌 힘들게 가져왔구만 타박한다고 하셨습니다. 터미널 가게에서 까만 비닐을 얻어와 김치통을 싸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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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안먹고 사는 사람이 어딨다고, 냄새난다고 코를 막고 무안을 주냐?” 할머닌 버스를 타고 오시면서 사람들이 눈치를 줬다며 애둘러 말하셨습니다. “아차 실수”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남들 눈치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듯 내 입에서도 나와 버렸던 것입니다. 할머니의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옵니다.
할머닌 바로 가야 겠다며, 김칫물이 든 만원권 2장을 쥐어 주셨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매표소로 달려 갔습니다.
난 버스안에서 엄청 울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난 무역회사에 취직을 하였고 할머니가 아프다고 하시면 약제상에 가서 좋다는 약을 사 보내드리고 생신에는 동네할머니들과 식사라도 하시라며 용돈도 보내드고, 주말엔 할머니랑 장도 구경갔습니다. 한번은 돈까스를 사드렸는데 너무 맛이 있어 두 그릇도 먹겠다며 접시를 비웠습니다. “맛있는거 많이 사드릴께요.”
할머닌 손녀딸 시집가서 예쁜 새끼 낳는 거 보고 죽으면 소원이 없다하셨습니다.
소원대로 나는 결혼을 했고 예쁜 딸아이도 낳았습니다. 팔순이 되신 우리 할머니. 허리는 구부러져있고, 검은 머리는 찿아 볼수도 없는 정말이지 진짜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전처럼 맛있는 음식도, 설탕뿌린 누룽지도, 맛있는 짠지도 이제 먹지 못합니다.
이제 할머니의 희생으로 나를 있게 하였으니 사랑에 보답을 할려고 합니다. 고생스럽던 어린 시절, 다시 돌아보면 아름다웠던 유년시절, 풍경들을 떠올리며 할머니랑 마음껏 하늘 높이 웃어 보고 싶습니다.
“할머니 오래오래 행복하게 저랑 함께 하셔야 되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