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적지 않은 나이라 별의별 일 다 겪었지만 얼마 전 남편의 행동만큼 열 받는 일이 없었네요.
저는 외동딸로 태어나 부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20대 어린 나이에 애가 먼저 들어서서 결혼했는데요.
가정 꾸린다고 바쁘고 사는 게 힘들다는 핑계로 친정에 찾아가서 도움 드린 적도 많지 않았어요.
못난 딸이지만 그래도 친정에서는 우리 아이들도 틈날 때마다 봐주시고 사랑을 많이 주셨는데요.
반대로 시부모님은 우리 애들한테 관심도 없고 용돈도 잘 안 챙겨주면서 오라가라 바라는 것만 많아요.
남편도 결혼 전에는 안 그랬는데 결혼하고 애 낳고 나서는 시부모 아들 아니랄까 봐 사람이 180 도 바뀌었네요.
이번 생은 틀렸다 생각하고 둘이서 열심히 돈이라도 벌어보자 했더니, 그래도 제법 여유돈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남편과 둘이서 힘들게 모은 돈 우리 가족 외식할 때나 여행 요긴하게 쓰자고 했는데, 남편이 마음대로 써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얼마 전에 시부모님 댁에 갔는데 제가 사고 싶었던 도어 네 개짜리 최신식 냉장고가 떡하니 있더라고요.
어머 두 분 냉장고 언제 사셨어요. 이거 저도 갖고 싶었던 냉장고였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더라구요.
우리가 이 정도 살 돈은 있다. 남편 퇴직금 받은 돈으로 새 냉장고 하나 사달라고 했지.
그런데 저번에 쓰던 냉장고는 구모델이었어도 멀쩡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드니까 아끼는 것도 다 소용없더라 새 냉장고 드렸더니, 주방도 화사해지고, 얼마나 좋니.
저번에 쓰던 냉장고는 버리지 말고 너희한테 줄 걸 그랬다.
시어머니는 신이 났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새 냉장고 기능까지 설명해 가며 자랑을 늘어놓았는데요.
솔직히 부럽긴 하더라고요.
우리 집 냉장고도 낡았는데 이번에 바꾸면 어떨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10년은 더 쓴다는 대답이 돌아올 걸 알아서 묻지도 않았는데요.
그러다 명절에 친정에 들렀는데 혼자 사시는 엄마가 전기밥솥이 고장 났다며 옛날에 쓰던 큰 압력솥으로 밥을 해주시더라고요.
엄마 밥솥 언제 고장 났어 얘기라도 하지.
뭐 그런 걸 얘기해 고장나면 압력솥으로 밥 해 먹으면 되는데 겨울에 보온도 안 되고 무겁고 설거지도 귀찮은데 아무리 그래도 새로 하나 사야지.
괜찮아 요새는, 즉석밥도 잘 나오고 밥 한 번에 많이 했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도 돼.
너희들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밥 먹는 사람도 나밖에 없는데 새 거 사면 뭐해.
하지만 워낙 절약하시는 성격이라, 즉석밥도 비싸다고 안 드시고 새밥솥 역시 안 사시고 불편하게 사실 걸 알기에 이참에 무겁고 불편한 압력솥 대신 소형가구용 전기밥솥을 사드려야겠다. 싶었는데요.
여보 우리 엄마 밥솥 고장나서 옛날에 쓰던 압력솥으로 밥 해 드시는데 모아놓은 돈에서 작은 밥솥 하나 살 돈만 좀 뺏으면 안 될까?
내가 나중에 월급 타면 채워 넣을게.
뭐 밥솥을 꼭 돈으로 사야 돼 ?
밥솥이 없어서 무거운 솥으로 힘들게 밥해 드시는데 어떻게해.
안 돼 돈은 우리 가족한테만 쓰기로 약속했잖아.
나중에 사 밥솥이 얼마 한다고 그래?
삼사 인용 전기 압력솥도 유명 브랜드 제품 20만 원이면 살 수 있는데, 그거 빼 쓴다고 뭐가 달라지냐.
아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그리고 장모님도 안 사줘도 괜찮다고 하셨잖아.
너는 그 말을 믿냐 나한테 단돈 1000원이라도 부담 줄까 봐 괜찮다고 말씀하신 거지.
딴 데 쓰는 것도 아니고 장모님 작은 밥솥 하나 사드리는 돈이 그렇게 아까워?
저희 부부는 그날 심하게 다투고 역시 서럽고 울컥해서 감정이 많이 상했는데요.
남편에게는 당분간 친정에서 출퇴근한다고 하고 막내는 내가 데려가니까 큰애는 시부모더러 등하교 시키던지 알아서 하라고 얘기하고 짐을 챙겼어요.
제가 없는 동안 빨래도 제대로 안 할까 봐 친정에 가기 전에 빨래라도 한 번 돌려놓고 가려고 색깔 없고 아닌 옷을 구분해서 정리하려고 했는데요.
특히 옷주머니에 종이 같은 게 있으면 나중에 종이가 찢어져 젖은 옷에 붙으니까.
세탁 전 미리 호주머니를 점검하곤 합니다.
그런데 남편의 점퍼 안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만져봤더니, 배달 영수증이란 게 나오더라고요.
영수증에는 남편 이름 모델명 가격 시부모님네 주소 배송일 같은 게 적혀있었어요.
이상하다 싶어 모델명에 나온 영문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세상에 시모가 그렇게 자랑질을 하던 도어 네 개짜리 신형 냉장고더라구요.
모델명 금액 배송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지길래 영수증을 보여주며 남편을 추궁했더니, 남편은 마지못해 자기가 사줬다고 시인하더라고요.
그 돈만큼은 우리 식구한테 쓰는 거 말고는 안 된다며 우리 엄마한테 작은 밥솥 하나 사주는 것도 필사적으로 막더니, 너네 엄마한테는 10배가 넘는 최신 냉장고를 사줬어.
너는 그거 사주고 나서 우리 엄마 밥솥 없이 사는 거 보고도 양심에 안 찔렸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안 사드리려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 잔고 부족한 거 보면 불같이 화낼까 봐 내가 채워 넣을 때까지 말 안 하려고 했어.
썼던 돈 금방 메꾸면 진짜 비싼 밥솥으로 사드릴 생각이었어.
200만 원이 넘는 돈을 어떻게 금방 메꾸려고 그래 ?
나 몰래 음흉하게 돈 쓴 것도 열받는데 어머님이나 아버님도 연기 참 잘하시더라.
세 명이서 사람 하나 바보 만드니까 재밌어?
미안해 사과는 필요 없고 이제부터 남은 돈은 내가 알아서 쓸 거니까 당신은 절대 토 달지 마.
알겠어 저는 남은 돈으로 친정에 전기밥솥을 사드리는 김에 낡은 냉장고도 신제품으로 바꿔드리고 티비도 큰 걸로 새로 사드렸어요.
간만에 제대로 눈치 안 보고 효도했는데도 이래도 괜찮은 거냐며 안절부절하시는 친정엄마를 보니 마음이 아팠네요.
그래도 티비 보는 게 하루의 낙인 우리 어머니가 큰 화면으로 드라마를 보니까, 너무 신난다고 아이처럼 기뻐하시니 돈 쓴 보람이 확 느껴지더라고요.
남편은 앞에서도 효도하고, 뒤에서는 몰래 비싼 가전도 사주는데 제가 똑같이 못할 게 뭔가요.
옛날엔 남편 눈치 본다고 친정엄마께 신경을 너무 안 써드렸는데 이제는 누가 눈치 주든 말든 당당하게 효도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