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배가 너무 고팠던 영국소녀, 코리아 타운에서 밥을 달라 하였고 차이나 타운과 너무나 상반된 충격적인 반응에 눈물을 흘리며 오열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국 언던에 살고 있는 해리슨이라고 합니다. 해리슨님 반갑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어릴 적 코리아타운 한국 식당에서 받은 보은과 그와 관련된 일화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 아기 시절 어머니는 홀몸으로 저를 키울 자신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제가 왼쪽 다리가 선천적으로 안 좋아 저를 버린 건지 이유는 몰랐습니다.
제가 기억나는 시점은 런던에 있는 보육원에서 괴롭힘과 주먹을 밥 먹듯이 받으며 컸던 것뿐이었어요.


저는 왼쪽 다리가 안 좋으니 항상 절뚝거리며 걸었어요.
보육 교사는 제가 다른 아이들의 속도에 못 따라온다고 항상 핀잔을 주고 은근히 저를 애들 앞에서 꼽주곤 했죠.
그래서 그런 걸까요? 보육원 아이들도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10대 이전에는 좀 덜했는데 아이들도 점점 자라면서 집단적으로 저희 밥에 우유를 붓는다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서 저를 쩔뚝이라고 불렀죠 저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17살쯤이 됐을 때 도저히 이곳에서 버티지 못하겠다. 싶어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저는 나가 굶어 죽거나 여기서 괴롭힘 당해서 죽거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막상 나오니 보육원 밖은 더 심한 지옥이더군요. 저는 밖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면서 지냈습니다.


10대 패거리들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지내는 것이 무한 반복되었죠.
저를 구원해 줄 어떠한 것도 찾지 못할 만큼 사회는 냉혈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은 3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가 있었어요.
비라도 오면 빗물이라도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했는데 그 주에 비도 한 방울 안 내리더군요.


저는 아무 식당이라도 들어가서 물과 음식을 구걸해야 했어요.

런던에 자리 잡힌 아시아타운에 가면 영국인들보다 좀 더 인색할까 싶어서 걸어걸어 차이나 타운에 들어섰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건물과 건물 그 사이에 주황색 풍등이 즐비했어요.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한 중국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저를 매섭게 쳐다보면서 돈은 있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따가 거짓말 쳤습니다.
레스토랑 종업원들은 제 차림새를 위아래로 흘기며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다고 했으니 어쨌든 자리에 저를 앉히긴 한 것입니다.
저는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을 시켰어요. 고민할 새가 없었습니다.
빨리 시켜서 빠르게 먹고 도망쳐 나가야 했으니깐요. 저는 제 눈에 바로 띄었던 마라탕을 하나 시켰습니다.
나오자마자 누가 쫓아오듯이 먹어치우기 시작했죠.

근데 그렇게 배가 죽을 정도로 고픈 와중에도 맛이 없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참 신기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말하곤 하죠.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면 돌을 먹어도 씹어먹는다고요.


근데 이건 음식이라고 하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이 없었어요.
시고 맵고 짜고 다 있죠. 마라탕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저의 취향과는 너무 안 맞았습니다.
결국 저는 음식을 많이 남겼습니다. 돈 주고 사 먹었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맛이었어요.


나는 다 먹었다. 싶어서 도망칠 각을 보고 있었죠. 종업원들이 다른 손님들에게 한 눈을 판 순간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자리를 박차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절뚝거리는 다리로 얼마큼 빠르게 도망가겠습니까?

뒤에서 식당 종업원 아저씨가 중국말로 소리를 지르면서 저에게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어요.
결국 저는 차이나타운 옆에 앞에 있는 대영 박물관에서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를 개 패듯 때리기 시작했죠. 저를 눕혀 놓고 사정 없이 주먹으로 얼굴을 내려치기 시작했어요.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습을 보고 피하기만 했지 어느 하나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너덜너덜대었을 쯤 아저씨는 음식 값이라도 받아야겠다며 입고 있는 제가 입고 있는 낡은 티셔츠를 벗겼고 제 얼굴에 침을 뱉고는 다시 차이나 차운으로 걸어갔습니다.
낡은 어린아이 티셔츠를 가져가서 어디다 쓰려고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요.
저는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멍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인생은 앞으로도 이렇게 깜깜하기만 할까 싶은 생각과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넋을 잃은 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늘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맞고도 와중에 마실 수 있는 빗방울이 반가워 입을 벌린 채 빗물을 받아먹는 제 모습이 한없이 처량해 보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거의 한 시간째 누워서 빗물만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처없이 걷기만 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걸었던지 뉴몰든까지 왔더라고요. 그곳에는 또 다른 아시아타운인 코리안타운이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아주 달콤한 양념과 고기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저는 태어나서 그런 향은 처음 맡아봤어요.
저는 홀린 듯 냄새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곳은 바로 한국식 양념 갈비집이었어요.
그리고 안에 사장님처럼 보이는 중년에 한국 여자분이 계셨죠 .
저와 그녀는 눈이 마주쳤고 저는 놀라서 눈을 내려 깔았어요.
얼굴이 피투성에다가 비 맞은 생쥐꼴을 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그곳 근처에서 가만히 서서 냄새만 맡으며 나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찰나였습니다.
고깃집 사장님이 갑자기 저에게 다가오더니, 우산을 하나 건네주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저에게 말했어요. 밖에서 멀뚱히 서서 보고 있지만 말고 들어와서 갈비 맛 한번 봐라.


우리 집 갈비는 다른 집하고 차원이 다르다. 저는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였지만 그게 어떤 느낌으로 하는 말인지는 알았죠.
저는 손사래를 치며 돈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데 그녀는 괜찮다는 식의 표정을 짓더니, 제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끌고 갔죠.


안에는 많은 영국인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제 몰골을 보면서 코를 막으면서 불편한 표정을 지었죠.
저는 눈치가 너무 보였지만 배가 고파서 이대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잠시 뒤 사장님은 안쪽에서 가게 전용 티셔츠를 하나 가지고 와 저에게 건네주며 이거 일단 입으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양념이 잘 절여진 육질 좋은 갈비를 가지고 오고 제 눈앞에서 그것을 엄청 맛나게 구워주셨어요.
갈비와 더불어 파절임과 된장찌개 그리고 냉면이란 것도 가져다 주셨습니다.
맘껏 먹으라고 오늘은 너의 날이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진짜 눈알이 뒤집힌 채로 쉴 새 없이 거기 있는 음식을 다 먹어 치웠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봤습니다. 고기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눈처럼 녹아버리듯 육질이 부드럽고 만났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황홀함은 잊혀지지 않더군요.


처음 맛본 한식의 감동을 느끼면서 저는 갈비 5인분을 뚝딱 먹어치워 버렸습니다.
사장님의 따뜻한 인심에 저는 감동을 받아 다 먹고 나서 그때서야 정신이 바짝 든 건지 저는 오열하면서 사장님께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건넸죠 .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저에게 이건 용돈이라며 백 파운드를 주는 것이 아닙니까.
거지에게 이런 도움을 주다니 저는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
사장님은 이 돈으로 한번 열심히 자립해 보라고 말하셨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잘 되지 않더라도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이곳에 오라고요.

자기 아들과 같은 또래여서 마음이 쓰인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녀의 따스함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가게를 나왔습니다.
배고프면 또 오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그곳을 뒤로 갈 수 없었어요.
나중에 은혜를 갚기 위해 절대 죽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살아내서 나중에 성공하여 이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살았죠 .


그때 사장님의 따스한 말과 돈으로 저는 다행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나름 정상적인 삶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이후로 10년이 훌쩍 지나 지나고 저는 그곳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근데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갈비집은 그대로 있더군요. 최근 한류 바람 탓 때문인지 코리아타운이 성업 중이었어요.
그에 반해 차이나 타운은 점점 몰락 하고 있었죠.

사장님은 장성한 제 얼굴을 보더니, 말없이 다가와 꼭 저를 안아주었고 저는 그때 제게 빌려주었던 백 파운드의 10년만큼의 이자를 얹어 사장님께 드렸습니다.
사장님은 돈을 절대 받지 않으려 했어요. 한참을 실랑이 끝에 결국 사장님이 승리했습니다.


이 돈을 가져가서 나중에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투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또 눈물 한 바가지를 흘리며 돌아오게 되었죠.
이후로도 저는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갈비집을 방문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장님과 한국어로 소통하고 싶어서 열심히 한국어 공부도 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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