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다…” 78게 가수 현철 최근 부인이 직접 전한 안타까운 소식

지난 2020년에는 불우의 명곡에 함께 출연한 하춘와 함께 현철의 레전드 가수로서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선 보였습니다.

현철은 친한 친구인 송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최근 세상을 떠난 현미의 빈소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종 투병설과 사실이 아닌 루머가 돌았지만 실제로 현철은 약 5년 전 경추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회복 중으로 집에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80대의 고령이지만 그는 여전히 정통 트로트의 진수로 평가받는 특유의 창법과 목소리로 활동했습니다.

현철은 꺾기의 맛을 낸 노래 스타일로 국민 가수로서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토종 된장 같은 구수한 목소리와 독특한 꺾기 창법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942년에 부산에서 태어난 현철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일을 도와 시장에서 씨앗을 파는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뛰어난 박달재 노래 솜씨를 이어받아 현철은 학창시절부터 노래 대회에 참가했고 독특한 목소리와 노래 실력으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수보다는 은행원이 되라고 조언하여 현철은 일단은 노래에 꿈을 접고 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가수의 꿈을 버리지 않고 노래에 다시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1966년에는 나이 24살에 두 번째 앨범 무정한 그대를 발표하며 트로트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는 예명 태현철들 사용했는데 그의 목소리와 꺾기가 이미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남진과 나훈아가 주목받는 시기였기에 신인 남자 가수로서 인기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철은 구수한 목소리와 특유의 꺾기로 대중의 사랑을 얻어낸 이어지는 20년 동안의 무명시절을 견뎌냈습니다.

무명시절의 현철은 자신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됐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때 결혼식은 물 한 그릇 띄우고 진행되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지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신혼집에서부터 시작해 13번의 이사를 떠나야 했으며 처음엔 셋방의 작은 살림에서 시작하여 봉지살로 입맛을 달랐습니다.

겨울이면 한 번에 많은 연탄을 사기 어려워 낮장으로 연탄을 사다가 추위를 견뎌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수로서 수입이 없었던 현철은 생계를 위해 두 사람이 모두 노력해야 했습니다.

낮에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며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간에 다투거나 목소리를 높인 적은 없었고 아내는 언제나 따뜻한 말로 현철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현철은 아내의 지지와 독특한 음색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래를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무명한 시절은 끝이 보이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결국은 부산으로 내려와 가입한 현철과 벌떼들 그룹은 현찰과 함께 주로 팝송을 트로트 형식으로 부르며 활동했습니다.

그룹은 팝송을 트로트 스타일로 가창하여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지만 그룹 내부에서는 멤버들의 이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룹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현철 역시 가수 생활을 마감하려 했습니다.

그때 작곡가 박성호의 초대로 현철과 벌떼들 그룹의 리드싱어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현철지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룹은 팝송을 트로트 형식으로 재해석하여 부산의 반무대에서 활동했으며 노래들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룹의 성공은 크지 않았으며 멤버들의 이탈로그룹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현철 또한 가수로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힘들게 축적한 노래에 희망을 걸어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중 현철은 1982년에 안 지나서나 당신 생각을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이 노래는 현찰과 벌떼들 그룹 활동 당시의 곡인데 그룹 내부적인 작곡가인 박성훈의 레코드 회사 입사로 음반으로 발매되며 대중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현철은 다시 한번 희망의 끈을 찾아 노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는 내 마음별과 같이 라는 곡도 히트시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현철의 얼굴은 아직까지도 거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와 마찬가지로 무명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1987년 아프리카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장에 있는 한국 근로자들을 위한 공연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공연에는 조용필 주현리 김연자 등 최고의 가수들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중 근로자들이 공연에 참석해 고국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꼭 보고 싶다며 사전에 현철도 공연단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현철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도 현철을 리비아로 파견된 근로자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철이 무명의 얼굴을 프로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의 노래에 실려 있던 그리움과 감동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하여 20여 년간의 무명생활이 끝나는 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현철은 대한민국 가요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정말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1988년에 발표한 봉산화 연정은 당시 김흥국의 호랑나비와 더불어 가요계의 주목을 받아 가요 대상에서 최고 가수상인 대상을 수상하는 등 큰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현철은 이 시상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척 감격스러워했음 이때 심지어 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수상소감을 말하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가수로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연결시켜 이야기하며 감동을 전달했습니다.

이후 199년에는 현철과 벌떼들에서 마지막까지 함께한 박성훈의 작곡으로 실타실어를 발표해 대상을 차지하며 국민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철은 작곡도 꽤 한편, 해왔는데 안 지나서나 당신 생각과 어미새 와 사랑의 이름표도 그의 작품입니다.

그의 노래로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송대관 태지나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리며 트로트의 부진기를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 그대로 탄탄하게 현찰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특히 1990년대에는 무려 6년간 연속으로 10대 가수상을 받으며 인기를 굳혔습니다.

결과 한때 현철은 한국여론조사에서 나훈아 남진 조용필을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가수로 선정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인기 속에서 그는 국민 가수로서 사랑을 받으며 나이 들어가도 여전히 가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8년부터 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요무대에서 머나먼 고향을 부를 때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시청자들은 그의 상태 대해 걱정과 우려를 표했습니다.

현철은 노래를 부를 때 조차 피드들에 의지해야 할 정도로 걷기가 어려워진 모습을 보여줬다는 방청객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2020년 가요무대에 출연해 봉선화 연정을 부르며 다시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여전히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표정이 굳어져 있고 포즈를 바꾸는 것도 힘들어서 노래를 부를 때 다리를 거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다리 움직임의 부재가 뇌경색의 증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우려했습니다.

현철의 동네 지인 중 한 명은 현철이 몇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져 재활치료 중이라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현철의 부인은 최근에 본인의 입으로 사실을 밝히며 정확한 병명을 밝히지 않은 채 큰 수술을 받고 재활 치료 중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녀는 병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팬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재활 훈련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최근 2023년 4월 13일 부인은 인터뷰에서 현철의 상태를 공개하며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부인에 따르면 5년 전 경주 디스크를 다치고 난 이후 신경 기능이 저하되어 재활치료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지만 회복이 어렵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녀는 이제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현황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한편, 그의 재산에 대해서도 궁금한 분들이 많은데요.

건강이 좋지 않더라도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야 합니다.

현철은 전국에 좋은 레시피를 모아 서울 광진구 구이동에서 장어 요리 전문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 내년 초에는 식당을 폐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식당이 위치한 건물이 현철의 소유인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습니다.

또한 그의 노래로 많은 히트를 낸 경력을 고려하면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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