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준 멋진 여자다..” 현미 장례식에서 12살 연하 남자친구가 오열한 이유

“가수 현미가 향년 85세로 생을 마감한 가운데, 남편 이봉조와 남자친구에게도 큰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경찰과 가요계에 따르면, 4일 오전 9시 37분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서 현미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팬클럽 회장이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최근까지 MBN 예능 프로그램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하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현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특히 가족들도 그녀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크게 놀라 급히 귀국 중입니다.

현미는 이혼한 남편이 사망한 이후 30여 년을 홀로 지냈고,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서 거주 중이었습니다. 고인의 슬하에는 유명 작곡가인 이봉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이영곤과 이영준이 있습니다. 이영곤은 ‘곤’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한 경력이 있으며, 두 아들 모두 미국에서 지내다 모친의 비보를 듣고 다급히 귀국하고 있는 중입니다. 현미의 측근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족들이 큰 충격을 받고, 모두 경황이 없는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현미는 중앙대학교 병원에 안치된 상태로, 두 아들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장례를 치를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현미는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보급 보이스와 넘치는 에너지로 ‘원조 디바’로서 오랫동안 활약했으며, 시간이 지나도 외모가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젊은 가수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하늘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현미는 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임신 8개월에 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엄앵란의 집으로 피신하는 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노화하지 않고 젊게 사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연하의 남자친구와의 연애를 공개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습니다.

현미는 과거 미8군 위문 공연 무대에서 칼춤을 추던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방송에 출연하며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8군 쇼 무대에서 활동하며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으며, 그때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그녀에게 팝송 ‘아 목동하’를 번안하여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2년, 현미는 이봉조와 첫 번째 앨범 작업을 하며, 당시 미국의 유명 팝송인 ‘냅킨콜’의 곡에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60년대에는 한명숙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김기덕 감독의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현미는 1968년 이봉조와 함께 ‘바람’을 발표하며 또 다른 히트곡을 만들어냈고, ‘같은 보고 싶은 얼굴’이라는 곡으로 계속해서 인기 가수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현미의 남편인 이봉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이봉조와 현미는 많은 작업을 함께 하며 사랑에 빠졌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은 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혼 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봉조에게는 본부인인 노전숙이 있었고, 현미는 이 사실을 모르고 결혼을 약속했으나 임신 후에야 이봉조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미는 결혼식을 진행했고, 시어머니와 가족들이 모두 그녀를 좋아해 안심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미는 이봉조가 여전히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관계를 정리하려 했으나 이봉조는 이를 거부하며 칼을 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이봉조와의 관계가 갈등을 겪으며 끝나게 된 후, 현미는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며 가수로 활동했지만, 당시 두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제대로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후에 현미는 이봉조의 건강이 악화되어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이봉조는 1987년 심장마비로 급사하게 됩니다. 현미는 이후 이봉조의 본처인 노전숙과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던 이봉조의 유언을 따라, 본처와 함께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미는 여전히 대중들에게 사랑받으며 연예계에서 활동을 이어갔고,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현미의 죽음과 남자친구의 오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그녀의 인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