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과 나훈아는 오랜 세월 동안 대표적인 가요 라이벌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들의 경쟁은 지금까지도 대중 가요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라이벌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남진과 나훈아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끊임없는 경쟁이 존재했지만, 특히 1980년대 말의 김한선과 이지연, 1990년대 후반의 HOT와 잭스키스, SES와 핑클, 유승준과 조성모, 그리고 동방신기와 빅뱅 등의 라이벌 구도가 떠오르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경쟁은 단순한 연예인 대결을 넘어, 모든 세대와 계층이 참여하는 전 국민적인 싸움이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라이벌들은 대부분 10대와 20대 초반을 대상으로 한 반면, 남진과 나훈아의 싸움은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모두가 관심을 가졌습니다. 할아버지, 학생, 직장인, 농민, 상인 등 누구나 두 사람 중 하나를 지지하며 갈라서 있었죠. 이 경쟁은 단순히 두 가수의 대결이 아닌,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향이 각각 김대중과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과 겹친 탓에 지역적 감정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그 대결은 치열했습니다. 직장과 모임에서, 심지어 집안에서도 남진편과 나훈아편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기도 했죠. 어린 아이들까지도 어른들로부터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강요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의 주간지들은 남진과 나훈아의 경쟁을 다룬 특집 기사로 도배되었고, 1972년 TV 쇼쇼쇼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이 함께 출연했을 때, 서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무대에서 어색하게 대치하는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두 가수의 경쟁은 그야말로 팽팽했습니다. 가수 정훈이는 두 사람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음을 강조하며, 공연장에서의 엄청난 환호와 열기에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훈아는 기성세대의 사랑을 받으며 국민 가수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남진이 당시 라이벌전에서 우위를 점한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남진은 방송사의 최고 인기상을 거의 독차지 했고, 나훈아는 그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노래 스타일과 접근법에서 전혀 달랐습니다. 남진은 미드 템포의 신나는 곡들을 주로 불렀고, 나훈아는 감성적이고 애절한 노래로 인기를 끌었죠.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무대에서 팬들을 매료시켰다면, 나훈아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그들의 삶의 배경도 극명히 달랐습니다. 남진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자 기업인이었고, 그는 1950년대에 이미 포드 사의 세단을 보유한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나훈아는 부산의 평범한 선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안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남진은 어린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여러 번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대기업 회장들 사이에서 식사할 때 대통령이 그를 정치적으로 큰 은혜를 받았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나훈아는 가수로서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지만, 집안의 반대로 가출을 결심하고, 여러 작곡가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가수로서의 입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꿈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나훈아는 정치적 발언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철학을 고수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최근에도 시국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밝혔으며, 남진과 비교되는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철학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나훈아는 언제나 대중을 위한 가수였고, 그의 공연은 대중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남진은 항상 대중의 친구로서 친근하게 다가갔고, 그의 무대는 그 자체로 대중과 소통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길은 결국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나훈아는 언제나 자신의 기준에 충실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했습니다. 그가 거부한 삼성 일가의 개인 파티 요청은 바로 그런 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대중의 술자리가 아닌, 대중 앞에서만 공연을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