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 다음 달 첫째 주에 친구들이랑 제주도 놀러 가기로 했어요.
그래요. 잘 됐네요. 부부 동반으로 같이 가나 봐요.
지안이도 같이 가요 아뇨 그게 남편이랑 아들은 다음에 데려가기로 하고 이번에는 우리 여자들끼리만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오빠가 혼자 애를 볼 줄을 몰라요.
언니가 딱 오 일만 우리 애 좀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5일이나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저도 볼 일도 있고 우리 애 하나 보기에도 힘들어서요 에이 한 명이나 두 명이나 거기서 거기예요.
이미 비행기 티켓이랑 호텔까지 예약 다 해놨는데 언니가 이제 와서 못 봐주겠다. 하면 나 진짜 방법 없어요.
미리 저한테 말도 안 했잖아요. 애 보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둘은 진짜 힘들 것 같아요.
몰라몰라 좀 봐달라고 하면, 봐주면 될 텐데 뭐가 그리 말이 많아요.
이미 예약까지 다 했다고요. 언니가 안 봐주면 나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니까 언니가 무조건 책임져요.
아가씨 진짜 5일은 너무한 거 같아요.
중간에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언니가 나보다 몇 달이라도 먼저 애를 낳아 봤으니까. 언니가 더 잘 보겠죠.
알아서 해주세요. 그럼 난 언니만 믿고 재미있게 놀다가 오겠습니다.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저는 3년 전에 결혼해서 이제 돌진한 딸아이 키우고 있는 30한 살의 여자입니다.
임신을 하면서 그전까지 다니던 회사에 2년 육아휴직을 내놓은 상황이고 지금은 집에서 딸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고 있어요.
시댁에는 저보다 두 살 아래로 시누가 하나 있는데, 속도위반으로 작년 초에 급하게 결혼하더니, 저희 애랑 몇 달 차이 안 나게 아이를 낳았더라구요.
처녀 시절부터 망나니처럼 술 좋아하고 밤늦게 놀러 다니기 좋아하던 시누는 아이 낳고 몸 풀자마자 바로 술 마시러 돌아다녔죠.
초반에는 저희 시댁의 아이를 맡기더니, 올봄에 시어머니께서 무릎 수술을 하시고, 난 뒤에는 맡길 곳이 사라져 버려서 술을 좀 덜 마시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제 버릇은 난 못 준다고 얼마 못 가서는 은근슬쩍 저한테 아이 좀 봐달라 하는 겁니다.
언니 오늘도 딱 3시간만 부탁해요. 9시에 아이 맡기러 갈게요 저번에도 세 시간 맡긴다고 해놓고, 새벽 두 시 넘어서 왔잖아요.
한꺼번에 아이 돌보는 건 쉽지 않아요. 술 마시러 나갈 시간에 그냥 집에서 아이랑 함께 있어 주세요.
누가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요. 친구들이 부르니까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거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쪼잔하게 그러지 말고 딱 세 시간 아니다. 넉넉하게 딱 네 시간만 맡아줘요.
자꾸 이런 식이면 정말 곤란해요. 이번이 마지막이고 다음부터는 아가씨 술 약속 땜에 애 봐주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알겠어요?
진짜 어떨 때 보면 엄마보다 잔소리가 많다니까 이따 저녁 9시에 집으로 찾아갈게요.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아이를 맡기고 술 마시러 놀러 나가더군요.
사회생활 운운하기에는 시누가 제대로 된 직장에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반 백수들이나 다름없는 자기 친구들이랑 허구한 날 술이나 퍼먹고 놀러 다닙니다.
애 엄마로서의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엄마를 두고 있는 조카가 불쌍해서 어쩔 수 없이 몇 번 봐주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제가 애돌보미 아주머니인 줄 아는 것 같아요.
남편에게 이야기하면 남편이 시누에게 대신 잔소리를 해주긴 하는데 딱 그때뿐이고 신우는 저희 남편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시어머니라도 멀쩡하면 좋겠는데 무릎 수술한 뒤로는 도저히 아이를 맡길 수도 없고 진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제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면 시누가 나중에 제가 볼 일이 있을 때 우리 애를 대신 봐주겠다고 자기한테 맡기고 가라 하는데 평소 집에서도 틈만 나면 술을 마셔대는 시누에게 어떻게 우리 애를 맡기고 나갈 수 있겠어요.
그나마 하루 세 시간 네 시간 봐주는 건 몸은 좀 힘들어도 기분만 나쁜 정도인데 자기 제주도 여행 간다고 5일 동안 애를 맡기고 가는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남편한테 당신 동생이 나한테 애 맡기고 제주도 간다고 하니까 몇 번 전화해서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하더니,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지 저보고 애 봐주지 말래요.
하지만 시댁도 바로 근처고 시누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데, 제가 육아휴직을 쓰고 집에서 하루종일 있는 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어떻게 애를 안 봐줄 수 있겠어요.
내가 제주도 여행 당장 취소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아직도 내 말을 안 듣네 .
그놈의 지지배가 애 맡기러 오면 현관문 잠궈버리고 열어주지 마.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가씨는 그렇다 치고 조카가 무슨 잘못이야 당신이 자꾸 받아주니까 걔가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더 그러잖아.
이번에 아주 혼구멍을 내줘야 하는데 됐어 그냥 내가 좀 고생하고 말지.
이번에 딱 5일만 봐주고 다음부터 술 먹으러 나간다고 하면, 그땐 얄짤 없을 거야.
지금 생각난 건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뭐 무슨 소리야? 남편이 갑자기 떠올린 생각을 듣자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솔직히 이번만 봐준다고 말했지만, 앞으로도 언제든지 애 데리고 와서 강제로 맡겨놓고 갈 것 같아서 싫었거든요.
무작정 싫다고 거절하기에도 핑계가 옹색하고 내가 맡기니까 나중에 너도 맡기라는 식인데 일방적으로 저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기분도 완전 별로였어요.
하지만 남편이 말해준 방법이라면 시누도 저한테 아무 말 못할 거고. 저도 더 이상은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겠더라구요.
그렇게 준비를 착착 진행했고 얼마 후 시누가 이야기했던 제주도 여행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시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저는 남편이 알려준 대로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고 있었죠.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로부터 연락이 오더라고요. 언니 대체 어디예요.
지금 집 앞인데 왜 아무도 없어요. 나 비행기 시간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단 말이에요.
어머 아가씨 이야기 못 들었어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나 지금 빨리 가야 한다니까.
비행기 놓치면 언니가 책임질 거예요. 내가 우리 친정엄마 환갑이라서 우리 부모님들 모시고 제주도 놀러왔어요.
여기 지금 날씨 너무 좋다. 아저씨는 몇 시 비행기예요. 빨리 와서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아요.
아니 언니가 지금 제주도에 있으면 어떻게 해요.
우리 애는 누가 봐주라고 내가 무슨 조카 대신 봐주는 사람이에요.
나도 우리 집 행사가 있고 내 할 일이 있는 사람이에요.
애 엄마가 여행을 다닐 거면 애를 같이 데리고 다녀야죠 5일 동안 애를 맡겨놓고 무슨 여행을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이제 와서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고요.
아이 데리고 가려 해도 비행기 티켓도 안 끊었단 말야 .
제가 처음부터 조카 맡아준다는 소리는 한 적도 없어요.
아가씨가 마음대로 맡기고 놀러 간다고 한 거지. 저는 이제 밥 먹으러 가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언니 괜히 애 봐주기 싫으니까.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 지금 제주도 맞아? 나랑 이야기 좀 해.
시누는 그날 결국 비행기를 못 탔어요. 당장 시간에 돌도 안 지난 아이를 어디다 맡기겠나요?
남의 집 아이를 한두 시간만 봐도 힘들고 부담스러운데 5일이나 맡아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애초에 처음부터 부담스럽다 힘들 것 같다고 몇 번씩이나 이야기했어요.
억지로 맡기고 도망가려고 했으면서 그게 애 엄마가 할 짓이 맞습니까?
저희 남편한테는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니까 시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때문에 제주도 여행 못 갔다고 일러바친 것 같더라구요.
시모한테 그런 이야기 해봤자 뭐합니까?
돌도 안 지난 갓난 아이를 새언니한테 맡겨놓고 놀러가려고 했으니 저희 시모 입장에서도 복장 터지는 일이죠.
너가 정신머리가 있는 거냐고 욕만 엄청 먹었다고 들었어요.
뒤로는 저한테 애 봐 달란 소리는 절대 안 하고 화가 단단히 났는지 저와 우리 남편을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구요.
덕분에 요즘 저는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따로 제주도를 간 건 아니고, 전날부터 친정집에 가 있었어요.
저희 친정엄마가 올해로 환갑이신 건 맞지만, 생신은 가을이고 친정 부모님 두 분만 효도 관광을 보내드리기로 했거든요.
돌 지난 아이 데리고 비행기 타는 것도 엄두가 안 나고 솔직히 지금은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불안해서 애랑 같이 여행은 못 갈 것 같아요.
나중에 남편 여름휴가 받으면 수영장 있는 펜션이나 풀빌라 예약해서 저희 세 가족끼리 조용히 다녀올 생각입니다.
대체 아이 맡기고 놀러 다니는 정신머리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요.
돌도 안 지난 지금도 모양인데 나중엔 얼마나 심하게 놀러 다닐지 벌써 걱정입니다.
내년이면 시누 나이도 30인데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