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양아들을 사랑으로 지켜낸 한국인 엄마의 감동적인 사연” 밥먹듯이 경찰서를 드나든 외국인 양아들 하지만 한국인 엄마는 항상 사랑으로 대했고 시간이 지나 양아들이 엄마에게 한 행동은 모두를 오열하게 만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호주와 미국을 오가며 양식장 사업과 요식업 프랜차이즈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로이드라고 합니다.
저는 태어나기를 범죄가 많은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친부모님은 저를 양육하는 일을 사실상 포기했죠.


저는 그저 주변 병원과 양로원을 스스로 찾아가 밥을 얻어먹고 간신히 살아나갔어요.
제 어린 시절은 그렇게 암울하고 우중충했습니다.
그러다 제 친부모님이 두 분 모두 약물에 중독되어 명을 달리하는 일이 생겼죠.

저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고 주 정부는 입양 희망자가 나올 때까지 저를 키워줄 위탁 가정을 찾아주었죠.
그때가 9살 때였는데 저는 그때 술과 담배는 물론 나쁜 짓까지 일삼는 형들에게 거둬져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저를 찾아내고 바로 고아원으로 보낸 뒤 위탁 가정을 찾을 때까지 그곳에서 절을 가둬 놓았죠 .
그리고 두 달이 지나자 절을 맡아줄 위탁 가정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한국계 가정이었어요.


부부셨는데 남편분은 싱글벙글하면서 참 웃음이 멋있는 분 아내분은 저를 보면서 시큰둥한 모습이셨죠 .
남편분은 자기보고 아저씨라고 부르라면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하셨어요.
반면에 아내분은 전혀 제가 반갑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를 처음 집에 들인 날 아내분은 제가 집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법칙을 알려주셨죠 절대 뛰어다니지 말고 살살 걸어다녀 여긴 아파트니까 그리고 밥은 더 달라고 하면, 더 줄 거고.

처음부터 부족하지 않게 줄 테니 반찬 투정만큼은 절대 하지 말아라.
저는 괜히 어린 마음에 심술이 나 뛰어다니고 반찬 투정을 하며 아내분의 뚜껑을 열리게 했죠.
아내분은 무척 화난 표정을 하신 뒤 저를 붙잡아 엉덩이 찜질을 놓곤 하셨습니다.
그러면 남편분께서 제게 오셔서는 아내분께 너무 험하게 대하지 말고 말로 타이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저를 데려다 마트에서 맛있는 과자와 젤리를 사주셨습니다.
또 저에게 이런 당부도 하셨죠. 로이드 아주머니는 너를 위탁해서 맡아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라 나는 내가 이렇게 말썽쟁이인 이유를 알고 있어 나쁜 형들과 몰려다니면서 배운 쓸데없는 반항기가 아직마저 다 빠지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아주머니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단다 알겠지?
저는 이런 말을 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였죠 내가 반항하면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저를 혼내는 일이 반복되었어요.

그러다 결국 제가 돌이키기 힘든 대형사고를 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나쁜 형들과 다니면서 강도질이나 소매치기 같은 못된 짓을 배우고 저지르고 다녔죠.
그러다 결국 어떤 깐깐한 행인에게 잘못 걸려 경찰에게 인계되고 말았어요.
경찰 아저씨는 소매치기를 지시한 사람이 누구냐면서 빨리 말 안 하면 부모님을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친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제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소매치기는 내가 스스로 한 짓이고 부모님도 없는 고아라고 사실 소매치기는 나쁜 형들이 시킨 짓이었지만 꼴의 남자 사이에 의리를 지킨다고 입을 꾹 다물기로 했던 거죠.
경찰 아저씨는 오랫동안 전화를 돌리시고는 제가 정말 고아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복지센터에 전화를 걸어 이 아이의 위탁 과정에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말했어요.
얼마 후 경찰서의 아주머니가 찾아와 어딨냐며 숨 가쁘게 두리번거리시는 것을 발견했죠.

아주머니는 저를 보시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면서 혹시 나쁜 일에 휘말린 건 아닌지 제 몸은 괜찮은지 확인하셨습니다.
경찰 아저씨는 제가 체포된 경위를 설명하시고 아이가 입을 다물고 있다며 설득을 부탁드린다고 하셨어요.
아주머니는 제 잘못은 절대 없을 거라며 혹시라도 나쁜 일을 했다면, 누가 시켰을 거라고 화를 내셨죠 .
그리고 훔친 것도 없는데 괜히 신고당한 거라면 오히려 신고자와 경찰 측이 인권침해를 하고 있는 거라고 하시면서 저를 일단 경찰서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애를 쓰셨습니다.


경찰 아저씨는 아주머니의 언변에 아무 말도 못하시고는 저를 경찰서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아주머니는 경찰서 밖으로 내보내진 저를 꼭 안아주셨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에 가서 꼭 말해달라고 해줬죠.
저는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말을 잘 듣기 시작했고, 나쁜 형들과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기 시작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어요.

다만 아주머니와 제가 함께 있을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저를 위탁해 키우던 한국인 부부는 법적으로 제 부모님이 아니어서 입양하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곁을 떠나야만 했죠.


어느 정도 제가 사회화가 되고 정상적인 교우관계가 생겼습니다.
복지사도 저에 대한 정보를 좋게 써주었고 정보를 토대로 입양 중개인들은 저를 입양 희망 가정으로 보내기 위한 홍보를 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마침내 저를 입양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오스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볼티모어의 백인 가족들이었고 경제 사정도 좋았죠.
누가 보아도 부족함 없이 자랄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국인 부부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함께 지내고 싶었죠.
전혀 다른 가정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복지부에서는 아이의 의견도 물론 중요하지만 위탁 가정 측의 의견도 중요하다고 해 결국 동의한다면, 저를 맡아 키우게 돼 한국인 부부의 선택에 저희 운명 분명히 갈리게 되었죠.
다행히도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저에게 정이 드셨는지 내가 여기 있어 준다면 참 행복할 거라 말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인종은 다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이 되었어요.


특히 아주머니 그러니까 어머니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지원해 주셨죠.
제가 워낙 하고 싶은 일이 금세 휙킥 바뀌는 성격이라 꽤나 골치가 아프셨을 겁니다.
야구와 미식축구 보이스카우트 같은 온갖 취미활동은 물론 제 개인 교사까지 무리해서 붙여주셨어요.

저는 가끔 입양아인 저를 위해서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냐고 물어보면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죠 .
한 번 하느님이 맡겨주신 아이를 끝까지 돌보는 것이 부모된 도리가 아니겠니.
내가 우리를 선택했으니 우리도 그만큼 최선을 다하는 거란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꼭 성공해서 보답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제대로 된 보답을 해드리기도 전에 저희 가족은 크나큰 상실을 겪게 되었습니다.
남편분 그러니까 제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죠.


그때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가장이 되었고 이제 내가 어머니를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대학에 입학할 준비나 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그날만은 어머니의 조언을 듣지 않고 제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일에 뛰어들었어요.
바로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집 앞 패스트푸드 식당 가게를 열었죠.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지만 점점 입소문을 타서 어머니가 더 이상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만들어 놨어요.


그러고 나서 저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키웠고 7호점까지 지점을 내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사업에 관한 재능을 확인하시고는 이제 이런 산업이 각광을 받을 거라면서 양식업을 추천해 주셨죠.


어머니도 대단하신 것이 제가 양식업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정부에서 양식업 확대에 큰 지원을 하더군요.
이렇게 될 줄을 어떻게 아셨는지 하필 양식업을 소개시켜 어머니의 안목이 경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양식장을 확보했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도 힘써 그러자 호주의 한 양식장에서도 양식장 수준을 보고 기술 제휴와 공동개발을 제안했습니다.
지금은 요식업 프랜차이즈 두 개 정도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미국과 호주에서 양식장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되었어요.

어느 정도 커지고 나니 제가 따로 뭔가를 건드릴 필요도 없이 전문 경영인을 뽑는 것이 몸과 마음이 편해졌죠 .


이후 이렇게 제 인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편하게 생활하실 강남 아파트도 구매했고 여기에서 또 다른 사업을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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