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에 걸린 딸을 한국에 데리고가자 생긴 충격적인 일” 이혼 후 실어증에 걸린 어린 딸을 키우던 프랑스 미혼모 한국여행에 갔다가 딸에게 일어난 충격적인 일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소피라고 합니다. 소피님 반갑습니다.
오늘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려고 방문해 주셨나요? 저는 네 살 난 딸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파리의 한 미혼모입니다.
혼자서 힘들게 딸 아이를 키우며 한국으로 업무차 출장을 가게 되었고 저와 딸이 한국에서 느꼈던 감동적인 경험들을 여러분들에게 전달드리고자 인터뷰 요청을 하였습니다.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시다니 많이 힘드셨겠군요. 과연 소피 님은 한국에서 어떤 경험들을 하고 파리로 돌아가셨을까요? 이제부터 소피님의 사연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 부모님은 프랑스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저를 낳고 키우셨습니다.
전 일찍부터 좁고 재미없는 시골보다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에 나가 살고 싶었죠.
그래서 열여덟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파리로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처음 시작했던 일은 모델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닮아 키가 크고 예뻤던 저는 하고 싶어하는 모델 일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지 말았어야 할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남자는 바로 제가 속한 팀을 맡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였습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패션계에서 많은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남자였죠.
그와 저는 같이 일을 하면서 호감이 생겨 연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는 성인 되기 전이어서 성적관계에 관한 정보가 미숙했어요.

결국 저는 뭣도 모르고 임신을 하게 되었답니다.
어쩔 수 없이 남자와 저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둘 다 뭔가 확신이 없는 관계였죠 .
그래서 그랬던 걸까요? 남편은 성년이 되기 전에 여자를 탐하는 그런 발칙한 놈이었던 겁니다.
제 딸 매건이 네 살이 되던 해에 그는 바람이 났습니다. 그것도 열여덟 살 여자랑요 .
정말 어이가 없죠 어린 딸이 보고 있는 앞에서 남편과 저는 많이 싸웠습니다.


유리창에 그릇을 던져 깨부수기도 하고, 안방에 들어가 남편의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와서 죽이려고 협박도 했었습니다.
그런 소란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결국 남편은 저와 딸을 버리고 열여덟 아이에게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놈이 집 밖을 마지막을 나설 때 매건이 매달린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하네요.

가지마 우리 버리지 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전 남편의 종아리를 붙잡고 떼를 쓰는데 저는 순간 울컥해서 얼마나 오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그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우리를 버리더군요. 충격 때문이었을까요?


뒤로 저는 매건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실어증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건 앞에서 남편과 싸우는 광경을 다 보였으니 그맘때 저는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딸 아이를 놔두고 세상을 뗄 수 없었어요.
제 꿈을 포기하고 매건을 위해서만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모델 일은 당장 그만두었고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다행히 한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은행원으로 혼자 일하고 애도 키우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매건을 어엿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어요.
전 열심히 일한 덕분인지 은행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때 은행장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한국에 있는 모 은행과 투자 협약을 위해 제가 한국에 방문해 줬으면 한다는 거예요.
전 아픈 어린 딸도 있고 그곳에 갈 여력이 안 된다고 처음에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은행장님은 저를 설득하며 모든 경비를 대주겠다는 겁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딸과 함께 분위기 전환하면 딸의 병도 낫지 않겠냐는 거예요.
틀린 말도 한이었습니다. 겸사겸사 딸도 데리고 가서 출장도 겸 한국이라는 나라 여행도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사는 게 바빠서 해외여행이라고는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었거든요.

언제 또 해외로 나가보겠나 싶어서 딸과 함께 한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영화에 나올 법한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으셨군요.
한국에서는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일단 딸과의 한국 여행에 앞서 업무부터 처리해야 했습니다.


딸을 한국에 있는 보육센터에 맡기고 저는 일에 먼저 집중했어요.
협약 관련 업무는 다 끝내놓고 은행 업무를 며칠 봤습니다.
그런데 은행 업무를 보러 은행에 방문하는 사람이 프랑스보다 훨씬 적더라고요.
뱅킹 정보에 등록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원과는 너무도 상반됐어요.
알고 봤더니, 한국은 스마트뱅킹이 발달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은행 업무뿐만 아니라 민원 서류 작업도 인터넷으로 다 해결한다고 해요. 공인인증서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죠. 대출도 모바일로 된다는 것에 의아하기만 했답니다.

은행원들은 모바일이나 인터넷을 잘 못 다루는 어르신 고객들만 대다수 상대했고 은행 문을 닫고 후반 업무들을 끝내고 퇴근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의 일 처리 속도도 어마무시하더군요. 파리에서 제가 하던 일을 이곳에서는 3분의1 도 안 걸렸어요.
아무래도 빨리 하는 한국인들의 특성도 있겠지만, 여러 업무 처리 기술들이 잘 마련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업무들을 며칠 간에 다 끝내고 드디어 메건과 저는 마음 편히 한국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었어요.
딸아이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참 좋아하더군요. 특히나 한국 분식을 좋아했어요.


아이들이 좋아라 하는 한국 음식은 뭐가 있을까? 검색해서 알게 된 게 바로 분식점이었어요.
숙소 근처에 빨간 간판으로 된 매운 냄새가 나는 분식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갑자기 제 손을 끌며 그곳에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저는 어눌한 한국말로 떡볶이와 순대 오뎅 튀김 등을 주문했죠.
평소 먹는 음식들 보다 매콤해서 저는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먹었는데 매건은 입맛에 맞았던지 매운 것을 어린아이가 다 먹는 게 아니겠어요. 평소 표정 변화가 없던 매건이었는데. 분식을 먹을 때만큼은 아주 밝은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뛰고 있었어요.


오랜만에 매건의 밝은 표정을 보아서 전 참으로 감동스러웠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명하다는 한강으로 갔어요. 파리에서는 물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도시 풍경이 보였어요.


사람들은 러닝과 자전거를 타며 운동하고 있고 아름다운 강변에는 청년들이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맥주도 한잔하더군요.
지구상의 유토피아는 이 한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을 쐬고 숙소로 가려고 지하철 방향으로 걷고 있을 때였어요.
길가에는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 샵이 있었습니다.
인형들이 마음에 들었던지 저에게 사달라고 조르더군요.


저는 큰 것은 들고 가기 힘드니 작은 사이즈 아이언 인형을 하나 사주었어요.
그것을 받자마자 매건은 빵긋 웃으면서 저에게 1년 만의 말이라는 것을 하는 겁니다.
맘이 땡큐 소음 없이 저는 오랜만에 듣는 딸 아이의 목소리에 너무 감격하여 매건을 안고 꼭 껴안아 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진짜로 은행장님이 말했던 것처럼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질 수 있겠다.
싶었던 것 같아요. 근데 바뀐 환경이 한국이라는 곳이라 더욱 다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닦고 우리는 빠르게 지하철로 향했습니다.

한강으로 오는 것은 택시를 탔는데 한국 온 김에 지하철도 한 번쯤 타 보고자 싶었거든요.
근데 저는 지하철에 충격적인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지하철이 너무도 깨끗하고 악취가 하나도 안 나는 거 아니겠어요.
파리의 지하철의 악취는 파리 시민들도 코를 막을 정도로 심각하거든요.


여름에는 사람들의 체취와 향수 냄새가 섞여 곤혹스러울 때도 맞춰 심지어 화장실이 없는 지하철도 많아 술 취한 프랑스 시민들이 역내에서 노상 방뇨를 하는 것은 일상이거든요.
그리고 파리에는 공중화장실이 500개뿐이라면 서울의 공중화장실 5500개라면서요.
우리는 모든 것을 이용하려면 전부 유료인데 그런 유료 화장실마저 지하철에 갖춰져 있지 않은 게 프랑스의 모습입니다.

근데 한국의 지하철은 역마다 화장실이 전부 갖춰져 있고 시설 또한 정말 깨끗하고 청결하더군요.
추후에 알게 된 것인데 한국에는 세계 회장실 협회가 있다면서요.
개발도상국 17개국에 40한 개의 공중화장실을 개설해 주고 화장실 포럼도 자주 연다고 하더군요.
한국의 보건 위생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제가 감동받은 것은 비단 시설뿐만이 아니었어요.
지하철을 탔을 때 딸이 많이 걸어서 힘들어했을 때였어요.
한 아주머니가 딸 여기 앉히라며 우리에게 자리를 비켜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습을 본 젊은 남자분도 자리를 비키더니, 이곳에 두 분 같이 앉으시라고 하더군요.
너무 친절한 거 아닌가요 한국 사람들은 배려와 친절이 몸에 배어 있고 특히 한국을 처음 접한 외국인들에게 많이 신경 써 준다고 들었거든요.

그뿐만이 아니라 제가 가장 놀랐던 게 하나 있었어요.
지하철에 핑크색 좌석이 한 칸마다 있었는데, 잘 보니 임산부 전용 좌석이 마련되어 있더라군요.
한국 너무 여성 프렌들리한 거 아닌가요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사회 전반적으로 의식화가 되어 있다니 정말 놀라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하철을 나와서 숙소를 찾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중간중간 친절하게 길 찾는 것을 도와주는 한국 사람들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뒤로 메건과 저는 프랑스 파리로 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보았던 간판들에 적혀있던 한국어들이 머릿속에 남아있는지 서점에서 발견한 한국어로 된 동화책을 사달라고까지 언제 하더라고요.

지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티비에 한국 프로그램이나 아이돌이 나오면 관심을 갖고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한국 드라마를 보며 자리 가만히 앉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답니다.
저와 매건의 좋은 기억을 심어준 한국과 한국인들 정말 감사합니다.


소피 님의 감동 사연 잘 들었습니다. 한국에 잠깐 오셔서 좋은 기억만 안고 가셨다니 제가 다 뿌듯하네요.
그런데 세계 화장실 협회는 처음 들어봤는데 검색해 보니 정말 수원의 변기 모양으로 건물이 지어져 있네요.
한국이 세계적으로 많은 영향을 알게 모르게 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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