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조항조는 트로트 가수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락 밴드의 보컬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락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생각날 정도로 록가수 그 자체였습니다.
조항조는 미8군 부대나 클럽 등에서 무대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하는데요. 당시 클럽에서 받는 돈은 단 3만원 이었습니다.
그 마저도 2만원은 멤버들의 여관비로 써야했고 나머지 만 원 마저 나눠 가졌습니다. 그가 이렇게 무대를 이어갔던 이유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였습니다.
결국 그는 열정 하나만으로 1978년 ‘서기 1999년’의 리드보컬로 데뷔했는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밴드마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합니다.
가난한 가수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조항조는 자신의 집에 심부름을 온 재미교포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하게 됩니다. 그 여학생이 바로 지금의 아내 홍숙재입니다.
결혼 후 아들까지 품에 안은 조항조는 처음으로 가장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경제력이 부족하다고 깨우친 그는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음악을 포기하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됩니다.
10년의 무명생활을 감당할 정도로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보다 소중한 가족을 위해 결국 그는 과감히 음악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한 그의 아내는 조항조는 무대에 서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에게 무대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한국에 있는 친구 유현상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되고, 한국에서 싱글 앨범을 내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의 싱글앨범은 트로트로 꾸려졌습니다. 트로트가 그의 외로운 타향살이에 위로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무명은 트로트 가수가 된 후에도 9년이나 지속되었는데요. 결국 조항조는 1998년 ‘남자라는 이유로’가 빅히트를 치고 난 뒤에야 무려 약 20년간의 무명시절을 청산하게 됩니다.
조항조가 20년의 무명시절을 견디고 성공한것이 놀라운 이유는 단순히 그가 20년을 버텼기 떄문이 아닙니다.
조항조가 무명 20년 동안 엄격한 자기관리를 끈질기게 해왔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한 사람이 생각나는데요. 바로 유재석입니다.
유재석은 무명시절이 기약없이 길어지자 개그맨의 꿈을 포기하고 호프집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재석은 뒤늦게 찾아온 소중한 기회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추격전 촬영 당시 숨이 너무 차오르자 그 즉시 금연을 결심한 유명한 일화를 들 수 있습니다.
조항조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는 무대에서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할 뿐 아니라 술, 담배 등 몸에 해로운 것들을 모두 끊었다고 합니다.
문득 유재석과 조항조를 보며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 그리고 준비된 사람만이 그것이 기회라는 것을 알아본다’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항조의 성공에 영향을 끼친 일등공신은 바로 그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음악을 포기한 남편을 무대로 돌려보내기도 했으며 무명인 조항조를 묵묵히 내조했는데요.
조항조가 유명해 진 후에도 남편이 유명하고 연예인인 것이지 내가 그런것은 아니라며 자신의 평범한 삶에 만족한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아마 그녀는 허영심 없고 소박한 성격의 인물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녀의 생각은 의외의 부작용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조항조 이혼’ ‘ 조항조 재혼’ 이라는 루머뿐 아니라 홍숙재가 조항조의 내연녀라는 말도 안되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자신이 조항조의 아내라는 티를 내고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가수라는 예술가가 팬들에게 주는 판타지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집에온 조항조는 내 남편이지만 밖에서의 조항조는 팬들의 조항조이길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참 그녀의 사려깊은 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자신의 1순위 였던 음악을 포기할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던 조항조와 그런 남편을 끝까지 뒷바라지 한 홍숙재. 두 사람의 끈끈한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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