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도 자를까 생각했었죠…” 불치병에 걸려 마지막 희망으로 한국에서 대수술을 받은 영국여자,한국에서 일어난 기적같은 일들은 모두를 감동시키고 말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학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KT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전해드릴 사연은 제가 재단을 직접 운영하기 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겪었던 한국에 대한 이야기예요.
오늘 꼭 제가 한국에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반드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KT 님의 사연 본격적으로 함께 알아보시죠. 먼저 저희 가족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네요.

아버지에게는 오빠 둘 그리고 막내딸인 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낳으신 뒤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에 결국 이혼하셔서 가족의 곁을 떠났죠.

그래서 저는 아예 어머니의 손길조차 느껴보지 못했고 오빠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시절부터 어머니를 보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오빠들은 명문 사립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할 정도로 심각한 양아치가 되어서 아버지의 속을 썩였죠 .
아버지는 저만큼은 오빠들처럼 되지 말라며 저에게 큰 기대를 거셨습니다.

오빠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어머니를 떠나게 만들고 보지 못하게 만든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때문에 그렇게 일부러 엇나가는 인생을 살았던 거겠죠.
하지만 오빠들이 그렇게 행동한 대가는 엉뚱한 제가 치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직접 재단 운영과 사업 그리고 경제와 금융에 대해 배워야만 했어요.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는 후계자 수업을 받은 것이죠.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제가 가진 모든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에게만 받는 게 아니라, 수많은 전문가들이 저를 가르치기 위해 직접 저희 저택으로 왔고 집에는 어떤 친구들도 데려올 수 없었어요.
저는 차라리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오빠들이 부러울 지경이 되었죠.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버지가 진로도 정해주고 돈을 잘 버는 법을 물려받는 것은 축복이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건 축복이죠. 하지만 그게 제 의지가 아니라면 좋은 일만은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수업은 제가 런던 정경대에 입학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완전히 방전되어서 휴식이 필요했죠. 저는 세계 여행을 다니고 싶었어요.


그냥 제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가 자유롭게 여행 다니는 건 인생 낭비라며 차라리 해외 봉사를 명목으로 가는 건 어떠냐고 했죠.

그동안 해외 봉사도 가지 않았으니 이제 가볼 때가 되었다면서 지인분께서 운영하고 계시는 해외 봉사단체의 통역 봉사자로서 참여했어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형태가 아니면 해외에도 못 나가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렇게 제가 간 곳은 인도 문바이의 최대 슬럼가인 다라비라는 곳이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어 파는 곳인데 뭔가 잘못된 곳이었죠.
전 세계에 값싼 도자기를 납품해 일부 기업들만 큰돈을 벌고 그 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은 20네 시간 내내 도자기를 만들어요.
그러고선 한국이나 영국이라면 하루 입에 풀칠도 불가능한 돈을 한 달 월급으로 받게 됩니다.
때문에 다라비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이곳을 탈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노예로 전락한 상태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다라비 사람들은 의료 혜택이고 뭐고 병이 걸리면 그냥 알아서 낫고 혹은 죽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우리 봉사단체는 그들을 위한 임시 병원용 텐트를 지어 그곳에서 잠시 진료와 치료를 하는 곳을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봉사를 하니 온갖 희귀병에 걸린 사람들이 몰려와 제대로 된 방역수단도 없이 그대로 환자들을 맞이해야 했어요.


저는 통역사이다. 보니 사람들과 면대면으로 대화를 해야 해서 사람들이 걸리는 풍토병도 걸리곤 했죠.
물론 풍토병에 걸릴 때를 대비해 백신을 맞고 왔어요. 그래도 걸릴 병은 걸리더라고요.
그중에서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심한 병을 가진 사람이 치료를 위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마치 머리에 울퉁불퉁한 벌레가 집을 지어 놓은 듯한 끔찍한 형상이었죠.


머리에 진물이 흘러 이미 손쓰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래서 저는 저도 모르게 제 왼손으로 그분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고 말해 주었죠.

저에게 신의 저주가 내리게 되어었습니다.
봉사가 끝나고 다시 대학 생활로 돌아왔을 때 공부가 힘들 정도로 손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왼손잡이인데 하필이면 왼손이 문제가 생겼죠. 병원에서는 전혀 원인을 잡지 못하더라고요.
심지어 저는 의료보험 없이 사설종합병원으로 가서 영국의 첨단 의료기술로 진단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봉사를 갔다 온 뒤 이렇게 된 거라며 애먼 지인분에게 전화로 엄청나게 화를 냈었죠.
저는 속으로 이렇게 된 거 학교도 쉬고 인생에 잠시 휴식 기간을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나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제 손에 뿌리 내린 이 저주 같은 병은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말이죠.
제 왼손은 병원에서 원인 모를 병이란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완전히 병변으로 뒤덮였습니다.
저는 왼손의 손가락을 제대로 구부리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어요.

이런 정도면 일상생활은 물론 밖에 제대로 다니지도 못할 수준 이었습니다.
그러자 봉사단체를 운영하시는 지인분께서 저에게 연락을 해오셨어요.
자기도 너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면서 해결책을 제시했죠. 그래도 지인분께서 해결책을 찾으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은 해결책에 감사를 드리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마나 한 소리로 들렸던 게 사실이에요.
그분은 영국 병원에서 진찰받지 말고 다른 나라에서 진료를 받아보라고 하셨죠.
영국보다 훨씬 의료체계가 발달한 나라는 많다며 저처럼 돈이 많다면 굳이 영국 병원만 이용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저도 그게 좋은 생각인 것 같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해외에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인분께서는 제 아버지를 직접 설득했죠. 아버지는 자신이 가보았던 스위스를 추천했습니다.
스위스는 자연 풍경도 좋으니 치료받으면서 기분도 좋을 거라 했어요.

저는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습니다. 지금 제 손이 걸*짝이 되어가 있는데, 기분이 좋아지고 뭐고 치료를 잘하는 나라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결국 아버지의 허황된 소리에 화가 나 큰소리로 아버지에게 대들고 말았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다가는 도저히 제 명에 못살겠다고 이것만이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 봉사를 나가 병에 걸려온 건 반은 아빠의 책임이면서 나머지 반은 조심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도 말했어요.
아버지는 그동안 반항 한 번 없던 제가 이렇게 말하니 벙찐 얼굴로 한동안 서 있었죠.
그리고 저는 제 예금을 모두 싸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여러 해외 의료 컨설턴트 분들이 한국 병원의 기술을 인정하시더군요.
일부 분들은 싱가포르를 추천하셨는데 제 왼손의 상태를 보시고는 싱가포르를 추천하던 사람들도 한국에 가야 할 것 같다는 소리를 했죠.

어쨌든 저는 그렇게 한국에 왔고 한국 병원은 저에게 코끼리 다리병에 일종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영국 병원은 진단조차 못했는데 한국병원은 정말 빠르게 진단을 해내더군요.


정말 불행 중 다행으로 왼손에만 퍼져 있을 때 빨리 왔기에 망정이지 늦게 스위스 같은 곳에서 시간을 허비했다면, 몸 전체에 퍼져서 한국에서도 해결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을 거라 말씀해 주셨어.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증상을 크게 완화하는 수술과 치료를 계속할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해주셨어요.


저는 진단을 받고 한국에 입원한 뒤 또 슬픈 소식을 들었죠. 바로 아버지의 부고였습니다.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문의 모든 재산은 저에게 상속되었죠. 그러자 곧이어 오빠들이 한국에 있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오빠들이 저를 찾아와 재산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저 이제 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라고 자기들 때문에 괜히 고생 많이 했다고 저를 위로하러 왔더라고요.


저는 솔직히 오빠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교육으로 저도 뭔가 배운 게 있었으니까.
그래도 저는 제 나름대로의 삶을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한국으로의 귀화를 목표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왜 하필 한국의 귀화를 생각했냐고요.


한국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겪었던 한국인 직원분들과 간호사분들 그리고 의사 선생님들의 친절함에 반했습니다.
영국이란 나라는 저에게 그닥 큰 행복을 주지 못했죠. 반면에 한국은 달랐어요
이곳에서 살면 행복할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들은 저처럼 살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을 위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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